한국에서 예전에 교육을 받은 나로서는 요즈음 한국 젊은이들은 어떤 참신한 교육을 받았을까 호기심이 난다. 호기심이 나는 건 당연하다. 내가 자란 나라에 잘난아이들이 주렁주렁 자라면 나로서는 조국이 잘 뻗어 나가고 있다는 기쁨이니깐 내 주변의 친척이나, 우연히 만나는 사람, 심지어는 멕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젊은이에게 까지 나는 때때로 요즈음 젊은이들이 받은 교육과 내가 받은 교육을 나 나름대로 호기심에 관찰 해 본다. 왜 호기심이 있을까?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 부터 알아 본다'하지 않나! 나라가 잘되려면 그만큼 떡잎이 좋은 아이들이 많아야 하지 않나?
세월이 많이 지났다. 세웰이 지났으니 교육도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졌겠고, 좋은 떡잎들이 여기저기 눈에 많이 띄어야 함이 당연한게 아닌가? 나는 될성부른 나무들을이 되는지 젊은이에게 말을 건네 본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비록 조그만 생활 반경에다 짧은경험에 의거 하지만, 그 첫번부터 신통치 않고 시큰둥하다. 왜 그리도 신통한 청년을 만나 볼 확률이 낮을 까! 즉, 여지껏 참신한 젊은이을 아직 만나보지 못한게 나의 고백이다.
미국에 사는 나는 신통한 백인, 인도계, 중국계 청년을 보게 된다, 하지만 한국에서 자란 청년들은 늘 싸하기만 하다. 미국서도 세대간의 차이는 있긴 하나 세데끼라 반목은 별로 없다. 생각이 보수적이냐 아니냐가 주된 차이정도이다. 하지만, 처음 보는 이가 말을 걸면, 그냥 수줍어 말 못하는 경우도 아니고, 싸가지가 없는 경우의 인상을 받는다. 왜 처음만난 사람에게 반목을 할까? 즉, 나로서는 좋은 떡잎은 커녕, 보통의 선선한 젊은이조차 보기 힘들다는 말이다.
나는 이 외에 어린 사람과 조금 시간을 같이 할 기회가 있었는데, 결국 미흡한 결론은 함국 젊은이가 화의적으로 느껴졌고, 이런 인간형을 만나보며 한국교육에 대한 의구심만 늘게됐다.
나는 나보다 나이든 선배가 몬스터일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호기심은 안든다. 그네들이 받은교육과 나와의 것은 별 큰 차이가 없고, 권위주의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니 할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보다 훨씬 더좋은 환경에서 자란 요즈음 젊은이가 더 좋은 인성을 같고 있어야 함이 당연 한게 아니 겠는가! 하지만 세월이 마냥 약이란 맞는 생각이 아닌가 보다. 요즈음 한국 젊은이는 무례하고 생각은 어리고 경쟁력도 없고 별로 환영 받지 못하는, 미국 젊은이나 중국사람 보다도 못하다는 깊은 의구심이 생긴다. 이것은 심한 인성교육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린 아이는 천진난만 해야 한다.
어린나이에 놀이는 중요한 공부다.
이나이에 놀이와 공부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잘 놀줄 아는 아이들이 공부도 잘 하고, 장차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 놀이의 질적 역량이 계속이어져 인문에서, 학문에서 열정이 생긴다
한국교육과 미국교육의 차이을 한단어로 표현 한다면 "놀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한국 부모는 놀이와 공부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한다; 학교나 사회가 보는 관점도
이와 흡사하다. 한국교육의 특징은 어린이 놀이에 교사거 빠져 있다는 것 이다 - 교사는 가르키는 사람이지, 놀이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개념이다 . 미국교육을 잘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놀이 공부 얼마나 잘 있혔느냐 이다.
친구들과 같이 놀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교육의 원동력이다.
놀이는 "선택"의 기술을 익히기 위한 좋은 방법이다. 어느 장난감 고르냐 부터, 친구 사귀기, 선택의 요지는 많다. 놀이도 공부인데, 한국에서는 언제 책상을 떠난 학습이 공부로 인정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어린이와 미국어린이들의 놀이 문화을 비교해 보면 어떨까?.
먼저 "잘 노느냐?"을 어떻케 "정의"하고, 지켜보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가령 60여명의 한국어린이와 미국어린이을 각각 교실이나 빈공간에 있게하고, 인원이 놀기에부족한 장난감을 공급해 준 다음에 얼마나 같이 싸우지 않고 서로서로 재미있게 지내는지 보면 어떨까? 동네도 동네마다 다르겠지만, 보통 잘사는 미국 동네수준을 기준으로 본다면 아마도 한국어린이가 미국어린이 보다 잘 못 놀거라 생각 된다.
아이들이 열심히 영어 공부해 타임즈까지도 읽을 수 도 있다는 뉴스을 얼마전에 보았다 - 부모가 못하던 걸 자식은 초장에 이루어 놨으니, 공부몰이을 안할 수 없으리라 생각 된다. 여전히 한국의 어린이는 "놀이 공부" 보다는 사회의 선택에 따라 "공부 공부"에 초점이 맞춰 있고 볼 수 있다.
결국 한국어린이는 초판 부터 미국어린이와는 전혀 다르게 키워진다고 볼 수 있다.
그이유는 한국의 어린이는 일찍부터 "공부", "입신", "출세" 등등 유교적인 면에 초점이 맞춰 있고 , 미국의 어린이는 먼저 초등교육이 "규율안 에서의 선택","자연에 대한 사랑", "표현"등등, 인간이 살아가기에 익혀야 할 휴머니즘에 접목이 되어 있고 볼수 있다.
유교와 휴머니즘은 서로 다르다. 휴머니즘은 인성에 가깝다면, 유교는 인성을 한번 걸러내 양념을 한 형태다. 영어을 직접 이해한 것이 아니고 번역본을 보는 형태이다. 유교가 왕정통치에 가깝다면, 휴머니즘은 민주주의을 쉽게 이룰 수 있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중국에서 조차 유교는 근대사에서 신랄하게 비판되어 왔다. 중국은 서양에게 문화적 정치적으로 뒤쳐진 이유을 유교에 탓하고 책을 태워 버리고 유학자을 처단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유교가 핍박을 받은 경우는 드물다. 한 중국인 친구는 나에게 "중국의 문화는 문화혁명 때 많이 말소되, 그의 흔적을 보려면 한국에 가 봐야 한다"고 말 했다. 유교의 흔적을 말한 거였다. 유교가 중국에서 탄압 받은것은 바로 부르조아지 기득권자을 위하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의 이론에 어굿난 다는 결론 때문에 그동안 간직했던 유교가 탄압을 받고 박살났다. 유교는 민주주의에도 어굿난다; 공평함과 정의, 합리함을 추구하지 못하는 관습을 유발 시킨다. 공자가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실질적으로 개인에게 일반 대중에게 떨어지는 알멩이는 빈털터리가 되곤한다. 결국 중국이 서양에 뒤졌다고 빡쳐서 "soul searching"을 한 이유와 타당성은 한국에게도 고스란히 남겨져 와 있었다.
중국에는 문화혁명으로 인해 유교가 없어 졌지만, 중국의 문제는 유교가 없어진 빈공간을 인성을 발달시킬 다른 사상이 채우질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는 떨어지지 않는 유교가 있다.
유교가 한국에 남아 있는건 자본주의의 기득권층의 이익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유교가 요즈음 중국에서도 다시 고개을 든다 한다. 그이유는 중국이 자본주의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인성이야기을 하면서 왜 유교을 꺼내 말하냐면, 그동안 유교의 관습이 인성이 있어야 할 자리을 차지한 까닭이다. 서양에서 휴머니즘의 바람이 불때 우리는 유교을 붙잡았다.
한나라의 미래는 인성교육에 달려있다.
한마디로 얼마나 초등학교 아이들은 천진나만하고 배움의 싹이 잘 자라고 있는지, 중고등 학생은 그토양 위에 정직하고 남을 배려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책임있는 행동을 실천 하고 배우는 교육이다. 인성교육이 잘되려면 주위사람의 자질이 좋아야 한다. 즉, 이는 교육자와 부모들의 자질에 관한 일이고, 사회의 분위기에 관한 일이다. 어른들의 인성을 제꼐놓코 아이들의 인성교육을 말할 수 없다; 어른들은ㅊ아이들 앞에서 우쭐거리거나 호박씨 까는 행동을 보이면 안된다 . 인성교육이 안되는 큰이유는 어른들의 자질이 부족하고 사회의 위선 때문일 것이다.
이교육은 기존의 유교방식을 철폐하고 새로운 가치관아래 우리 모두가 가춰야 할 기본 자세이고 지표다. 한나라의 교육의 발전, 문화 그리고 국민의 애국심의 높고 낮음을 인성교육을 제껴놓코 다룰 수가 없다. 한마디로 이는, "너의 집안이 어떤 집안이냐?", "너의 생각, 사고, 행동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데, 너는 어떤 사고와 행동을 할꺼냐?"라고 묻는 것과 도 같다.
나의 아들은 10년전 쯤에 한국을 방문 했을 때 산 모자을 잃어 버리고 왔다. 여행 중 깜빡 벤취두고 온 모자는 다시 가보니 없어졌다. 삐싼 물건이 아니여서 다행 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무엇을 잃어버리면 되찻는 경우가 드물다.
인성교육의 목적은 다같이 사는 방법을 모색하고 그렇케 삶을 사는 행동 방식이다.
세대간의 대화가 끊겼나? 인성교육이 안된 까닭이다.
교수가 학생을 성희롱? 사회가 인성교육을 몰라라 한 무지한 까닭이다.
도로 한복판에서 티격태격? 인성교육이 없는 까닭이다.
자식이 부모을 살해? 유교가 무너고 인성교육이 뒷받쳐 주지 못한 까닭이다.
부잣집 동네에는 있는 놀이터가 가난한 동네에는 없는가?
인성교육의 개념이 없는 사회인 까닭이다.
유교의 관습에 젖은 한국사회에서 참다운 인성교육 키우기란 정말 힘든 일 인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는 한국 기독교가 유교적 관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인성교육 함양에 힘을 기울여야 했는데 기회을 놓치고 제 구실을 못했다.
한마디로 안성교육은 민도을 나타낸다.
인성교육은 사회을 잘 굴러가게 하는 윤활류이고 밑거름이 된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 적당한 친절을 베푸는 것 또한 안성교육이다.
인성교육은 매너로서 나타내지고, 매너는 곧 "나는 몬스터가 아니고 사람 입니다."라는 의미이다. 한국사회의 대부분 문제가 사람들이 인성교육이 부족함에서 부터 비롯 된다.
지금에는 어떤지 모르지만 예전에 한국의 인성교육이란 도덕책이나 읽게하고, 선생은 어른에게 인사나 잘하라고 다그치는 정도로 그쳤다. 아이들은 생각도 해보게 히지 않고 그저 하라는데로, 극히 유교주의 관점, 즉 어른 들의 이기심에 치우친, 단편적인 개념의 발상이다. 이렇케 자란사람들은, 어른은 어른데로, 아이들은 아이들데로, 서로의 교감없이 세데차이 탓이나 하며, 이렇케 자란아이들은 윗사람에게 아부나 배우고, 나중에 정치,교육,경제 분야을 담당하는 윗사람으로 되면 온갖 비리를 저지르게 되는 몬스터가 되는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만 보게되는 몬스터을 옆에서 같이 말하면서 느끼게 되는 경험해 보았는가? 유교문화는 권위주의을 키우고 기득권을 보호한다, 그래서 몬스터가 나오기 좋다. 사회에서 만들어진 몬스터가 다시 인간이 될 수 가 있겄는가! 어려운 일 이다.
인성교육은 성교육과 비숫하다. 성교육을 사회가 잘 시키지도 않으면서 성폭력을 없애려고 하는 것과 같다. 내가 성을 갖고 있으면 남도 갖고 있는 것 이다. 그저 억누르거나 없는 것 처럼 행동하고 숨기면서 사는 전근대적인 유교적 방식이 아니다.
인성교육은 나이가 많고 적고을 떠나 서로가 인간임을 인식하고, 돈이 명예 그리고 권력이 전부가 될 수 없으며, 누구나 욕구, 인권이 있고, 행복하고 평등하게 살 권리가 있다는 개념을 확실히 심어주는 생활 철학이며 개념이며, 사회의 모든 일원이 서로서로 이개념을 생활 속에서 친절과 관용으로 서로 일깨워 주고 실행하며 사는 방식의 모태이다.
인성교육의 최전방은 교육자들이고 종교인이다. 이런사람들은 태권도의 검은 띄 사범님들 처럼 모든사람들이 인성교육에서 검은 띄을 따도록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저 책이나 읽고 읊조리는 것이 아니고, 서로서로을 대할 때 상대방의 인격과 존귀함을 염두하고 친절과 관용을 베풀 수 있는 훈련이다.
오만가지의 식물이 자라도 토양에서, 화분안에서 뿌리을 내리고 자란다. 인성교육은 사람으로 하면 이 토양, 화분에 관한 이슈이다.
고전책을 많이 읽으라 하고 권유하는 것도 이 인성함양을 하기 위함이다.
인성교육은 인간관계을 더욱 더 폭 넓혀 주고, 제데로 되어있지 않으면 인간관계가
쭈글쭈굴한 마른대추 처럼 재미도 없어진다. 구시대의 관습에 갖혀 새로운 형태의 인간관계을 형성하지 못하고 외롭게 사는 사람을 보게 된다. 인성교육은 새로운 인간관계을 형성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새로운 시대의 인간관계는 학연, 인종, 나이을 떠나, 어떻케 생각하고 어떤매너을 갖느냐에 딸려있다.
잃어버린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 주지 않코, 길을 묻는이에게 "왜 질문을 하느냐?"고 흘켜보는 관습은 유교문화가 얼마나 쓸데없는지을 한눈에 보여지게 하는 것이다.
인성교육은 가타 줄의 G-String이 있는 것 과도 같다. 없어도 별문제는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동네 콘서트을 떠나 더큰 콘서트을 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다.